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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7]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김일엽(1896-1971)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창간, 최초의 여성주간
체험에 근거한 신 여성해방론 펼쳐.... ‘신여성에서 참수행자’로의 삶
자유 향한 치열한 구도의 글쓰기 ‘귀감’



*기독교 집안에서 성숙한 소녀기 보내

일엽스님으로 잘 알려진 김원주(金元周)는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예수교 목사 아버지 김용겸의 맏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마대는 17세 때 초혼에 상처한 22세 홀아비 김씨에게 억지 혼인을 당했으나 두 사람은 곧 사이좋은 부부가 되었다. 부모 혼인 후 6년 만에 6대째 첫 아이로 태어난 그는 아들 못지않은 기대 속에 자랐다. 그러나 14세에 결핵을 앓던 어머니가 남동생 출산 후 세상을 떠나고 동생도 3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는 재혼하였으나 17세에 부친마저 별세하였다. 살림살이는 어머니 일 나간 동안 동생들을 돌보며 저녁을 스스로 준비해야 할 만큼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인주를 비롯해 형제들을 사랑한 그는 계모와 친모를 구분하지 않을 만큼 가족애가 두터웠다고 한다. 그도 역시 기독교 신자였고 일찍 개화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9세에 구세학교, 11세에는 윤심덕을 따라 진남포 삼승보통여학교에 다니며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숙성했다.


그러나 일엽은 12세에 동생의 죽음으로 처음 큰 슬픔을 맛보기 시작, 이어서 세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다 잃고는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또 그는 이화학당 재학시 어느 재산가 청년과 파혼하며 그에게서 받은 돈으로 자신의 상처를 메우지 못함을 알고는 어떤 돈도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엔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창자를 위로할 만한 음식과 한서를 피할 만한 옷만 있으면 그만이다”는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터득하였다.

 

*문학 동인, 직업적 문인으로 활동
일엽이 1907년 12세에 쓴 ‘동생의 죽음’이란 시는 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보다 1년 먼저 나온 국문자유시란 점에서 여성문학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에서 이채로운 존재로 뒤늦게 주목되고 있다.


또한 일엽의 사회활동은 3ㆍ1운동 때 자기 집 지하실에서 전단을 등사, 배포한 것을 비롯해, 이후 1920년 우리 나라 최초 여성잡지 「신여자」를 나혜석, 박인덕, 신줄리아와 함께 창간하여 스스로 최초 여성주간이 되었다. 동시에 1주 1회씩 ‘청탑회(靑塔會)’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상과 문학을 토론하며 잡지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일엽의 문학사적 공적은 큰 것이다. 그는 또 이에 그치지 않고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순수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정력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원주는 불구의 몸으로 잡지의 판매, 보급 등 헌신적으로 자신을 돕던 남편과 파탄, 이혼에 이르고 잡지 발행은 중단되었다. 남편 이교수는 의족을 한 남자로 첫번째 결혼에 놀란 신부가 도망한 사실을 일엽은 전혀 몰랐고 그것을 뒤늦게 안 그의 충격도 그만큼 컸던 것이다.

 

「신여자」는 5호를 예고한 채 4호로 끝났으나 그를 통한 일엽의 남다른 진취적 사상은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즉 그로부터 당시 신여성이란 유행어가 생겨났고, 김원주, 김명순, 나혜석 등 초창기 여성문인들이 신여성의 대명사로 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이혼 후에도 그는 문필 활동을 계속하여 1921년에는 「신민공론」편집 동인으로 참가하고, 또한 동아일보사 문예부 기자, 불교지 문화부장 등 직업적 문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문학 특성은 예술성보다 주제에 비중을 둬 작품 자체는 큰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수도생활에서도 글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평생의 업으로 여겼다. 이처럼 한국근대문학 초기에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의 작품활동은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문학활동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초기작품으로 소설 「계시」, 「지각」, 「순애의 죽음」, 「사랑과 시」, 「추회」, 「이별」, 「동생의 죽음」 등이 있으며 수상록 등 여러 책이 있다.

 

*자기 체험에 근거한 신여성해방론
유교적인 가부장제하에서 열악한 삶을 살았던 여성의 근대적 해방의식은 1920년 자유주의적 남녀평등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양성관계의 수립을 주장하는 ‘신여성론’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신여성론을 공론화한 그는 철저한 자기체험에 근거하여 기존의 성별도덕에 대한 정면도전을 시도하였다.


「신여성」지의 발간과 ‘신여자선언’을 도화선으로 하여 사회일각에서 자신들의 지위 및 역할에 대해 새롭게 자각한 여성들이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신여성을 하나의 사회적 동력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적극하였다.


즉 일엽은 「신여자」와 「폐허」지, 동아일보 등에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 ‘우리 여자의 요구와 주장,’ ‘여자교육의 필요’ 등의 글을 계속 발표하여 조선 남자들이 여자의 공순과 복종에 행복을 느끼고 유타(遊惰)의 폐습과 나약의 심연에 빠져 생존경쟁에서 낙오자가 됨으로써 가정은 불완전하고 사회는 야매하고 국가는 빈약하여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아무 지식없고 아무 경험없는 우리가 감히 신여자를 표방하고 사회에 나섬이 어찌 즐거워서 나서는 것이겠습니까? 몇 세기를 두고 우리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동물과 같이 여자를 몰아다가 남자의 유린에 맡기지 아니하였습니까?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인 일체의 구상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이것이 실로 ‘신여자’의 임무요, 사명이요, 또 존재의 이유로 삼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이때에 충분히 자각을 안하면 우리 여자 사회의 전도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지니, 요는 자각하여 교육과 직업과 책임으로 우리의 길을 우리가 개척함에 있으니, 과거는 말할 것 없거니와, 우리는 오늘날부터 남자의 기반(羈絆)을 벗어나서 참의미의 사람 노릇을 하여야 하겠도다. 이런 여자가 자각함은 한편으로는 여권을 신장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선의 문화를 개척함이라 하노라” 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 일엽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크게 제약하는 복식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는 옷이 갖추어야 할 3대 조건으로 위생, 예의, 자태를 든 후 우리 나라 여성의 의복에서 허리나 허리띠로 가슴을 겹겹이 동여매는 것을 비판하면서 서구 부인들이 건강한 이유를 “가슴을 동여매지 않고 젖퉁이와 허리를 벌겋게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 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개량복 만드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몸소 이를 착용하였다. 이에 대해 나혜석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로 같은 신여성 사이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결코 도덕도 아니오,
단지 사랑을 백열화시키는 연애의식과
유동하는 관념으로 항상 새로울 것”

 

열렬한 사랑예찬과 신정조론
김원주는 자유연애를 지지하며 특히 봉건적 가부장제하의 여성정절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의 ‘신정조론’은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차별적인 성윤리에 대한 대남성투쟁의 차원을 넘어서 “재래의 모든 제도와 전통과 관념에서 멀리 떠나 생명에 대한 청신한 의미를 환기코저 하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재래의 성도덕에 대하여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조는 결코 도덕도 아니오, 단지 사랑을 백열화시키는 연애의식과 같이 고정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념으로 항상 새로울 것입니다.” 고 하면서, 불륜으로 간주되던 관계조차 과감히 인정하려 하였다. 그녀의 ‘자유연애론’ 및 ‘신정조론’은 사회로부터의 이목이나 전통적인 윤리의식을 철저히 부정한 오직 ‘나’를 위한 의지의 발로이며, 또 그 이론을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사회규범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


“일체 생명은 사랑에서 우러나는 서로 돌보아지고 유대되는 힘과 섹스로 생산되는 번식력이 없다면 현실인 육체적 생명은 자멸할 것이다. 사랑과 섹스로 살아가는 것이 생명이지만 삶이 있기 전의 생명을 주제로 삼아 사랑과 섹스를 잘 조리하는데 따라 생명적 생활과 비생명적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 상징은 꽃이라고 생각한다. 꽃은 극히 착하고 가장 부드럽다.

 

또한 너그럽다. 그리하여 꽃의 세계에서는 쏘는 벌이나 썩히는 쇠파리까지 웃으며 맞아들인다. 그보다 더 힘이 세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그러니 가장 감수성이 부하고 열정이 왕성한 사춘기 청년 남녀의 일을 누가 시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과 같이 일엽은 단편을 통해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예찬은 물론 육체적 정조론에 대해 정신적 신정조론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사회에 하나의 성혁명이라 할 만큼 진보적인 주장을 펼쳐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동시에 그의 이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논리는 오히려 일반 사회에서 신여성이 설 자리를 좁히고 그들에 대한 비판을 더 하게 한 면도 있었다.

 


입산 수도 생활 끝에 입적

일엽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한 청년과의 만남과 사랑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일엽은 다시 숭실전문 하윤실 교수와 1933년까지 성북동 양옥집에서 약 2년간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남편도 승려 출신 재가신도로 그때부터 일엽은 불교 공부에 몰두하며 시내 절을 찾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리고 마침내 불가에 귀의, 고승만공이 있던 예산 수덕사에 입산해 본격적인 수도생활에 접어든다.


일엽은 1930년 승적에 이름을 올린 후 1961년까지 줄곧 수덕사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비구니 생활기금과 비구니 총림을 건립하기 위해 1억원 기금 목표로 춘원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를 각색,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 최초로 여승만의 불교극을 상연하기도 하였다. 1964년부터 건강이 나빠졌으나 70년부터 일체 약을 거부한 채 참선에 정진하다 1971년 1월 28일 76세에 입적하였다.


일엽은 수도 중에도 저술에 열중하여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 등을 발간했다. 당시 그의 여성관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남녀는 본성적으로 차이가 있고 타고난 하나의 운명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결국 김원주 일엽이 사회제도와 가치관과의 갈등과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불교에 귀의한 것을 보면 당시 여성의 본능과 욕구를 구속하고 억압한 사회구조가 얼마나 완강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최경연기자(womenisnews@hanmail.net)

2006-04-18, HIT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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